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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가문비나무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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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블로거라고 칭하고, 수시로 글감을 찾습니다. 마치 아침을 먹고 난 뒤 점심은 무얼 먹을까? 저녁은 또 무얼 먹지? 하는 일상처럼 글 하나 올리고 나면 다음엔 무얼 쓰지? 책장을 뒤지고 눈에 보이는 음식이며 풍경이며 열심히 사진을 찍습니다.
 
낮에 딸아이와 새로 생긴 이케아 고덕점에서 맛있는 멕시코 요리 타코를 먹으며 음식이 나오면 사진을 찍어야지, 딸아이에게 금방 말하고는 음식이 나오자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포크를 들었더니 "엄마는 블로거가 될 준비가 안 되어 있네~"라고 말하네요. ㅋ 얼른 사진을 찍어 보관합니다. 

 

이케아에서

책장을 살피니 오래 전에 구입해서 읽은 <가문비나무의 노래>가 눈에 띕니다. 감동의 울림이 많았던 이 책은 한 줄 한 줄 음미하며 읽게 됩니다.

독일의 바이올린 제작가 마틴 슐레스케의 책 가문비나무의 노래 머리말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라 하고, 특별한 의미가 담긴 시간을 '카이로스(Kairos)'라 했습니다. 깨어 있음으로 현재에 충실한 삶은 카이로스가 무엇인지 아는 삶입니다. 카이로스는 생명으로 채워진 현재입니다."

 

마틴 슐레스케는 독일에서 바이올린을 제작하는 아틀리에를 운영하고 있는데 해마다 약 20대의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만들어 내고 있는 악기의 장인입니다. 그는 첫 페이지에 바이올린의 재목으로 쓰이는 가문비나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지대에서 몇 년 만에 서둘러 자란 나무는 고지대에서 2~3백 년 넘는 세월동안 서서히 자란 가문비나무와 견줄 것이 못 됩니다. 가지가 무성한 나무로 바이올린을 만들면 매력적인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고지대의 가문비나무들은 천천히 자라면서 아래쪽 가지들을 스스로 떨굽니다. 어두운 산중에서 살아남기 위해 위쪽 가지들은 빛을 향해 위로 뻗어 오르고 빛이 닿지 않는 아래쪽 가지들은 떨어져 나가지요. 

바이올린 만들기에 딱 좋은 '가지 없는 목재'가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수목 한계선 바로 아래의 척박한 환경은 가문비나무가 생존하는 데는 고난이지만 울림에는 축복입니다. 메마른 땅이라는 위기를 통해 나무들이 아주 단단해지니까요."

퍼온 이미지

 
이 책은 단순히 악기를 만드는 이야기를 넘어서, 인간 존재의 의미, 고통의 가치, 소명, 아름다움,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해 깊이 사유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가문비나무는 바이올린의 울림판을 만드는 나무로, 인생과 영혼의 울림을 상징하는 중요한 소재로 등장합니다.
 
당신은 어떤 소리를 내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이 책을 읽으며 제가 살아온 날들을 반추하자니, 철부지처럼 생각없이, 남에게 잘보이려고만 하며 살아온 제 모습이 보입니다. 길지도 않은 세월을 시기질투하고 남과 비교하며 살아온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당신은 어떤 공명을 지니고 있습니까?
악기의 공명이 음색을 만듭니다. 공명 없이는 악기에 개성도 없습니다. 사람의 경우, 정신적 공명이 개성을 만든다고 합니다. (50쪽) 

너무 바쁘게 살아왔습니다. 정신을 돌볼 여가가 없었습니다. 내 안에 어떤 공명이 자리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했습니다. 저를 존중하고 아끼고 다독거리는 삶을 살지 못했으니 제 안의 공명은 다듬어지지 않은 날카로움이겠지요.

도나타 벤더스가 찍은 마틴 슐레스케

 삶은 울림을 만들어내는 여정입니다.
가문비나무가 잘 울리는 나무가 되기 위해 자연의 온갖 바람과, 눈보라, 그 고통을 견디며 자라는 과정이 있기에 공명의 최적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삶의 아픔과 상처가 영혼의 울림을 깊게 만드는 재료가 될 수 있다는 통찰을 줍니다.

살아오면서 견뎌야 했던 많은 상처와 아픔들, 고통은 은총의 포장지라며 위로해주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이런 고통을 겪어보지 않았기에 쉽게 그런 말을 한다고 속단했었지요.
 
그러나 진짜 아름다움은 고통과 조화를 이룰 때 나온다는 것을 이 나이 들어서야 깨닫습니다. 바이올린의 아름다운 소리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나무의 결과 긴장, 두께 등을 고려해 정성을 다해야 탄생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짧은 삶을 살면서 겪는 결을 받아들이고 정제할 때 깊은 존재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 책은 이야기 중심이기보다는 사유와 묵상이 주를 이루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더 쉽게 읽히고 잘  스며듭니다.
 
 우리 삶은 선택의 정글을 헤쳐 가는 과정이고,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또는 포기해야 할지 끊임없이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붙잡고 놓지 못하는 많은 것들, 돈과 명예, 자존심과 쓸데 없는 욕심을 붙들고 있는 우리에게 가문비나무는 버리라고 가르칩니다. 옳지 않은 것과 헤어지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가문비나무처럼 죽은 가지를 잘라내는 일입니다.

한없이 덜렁거리는 저도 잘 어울리지 않을 것같은 '완벽'이라는 단어에 집착합니다. 실수할까봐 두려운 것, 남에게 거절당할까봐 두려운 것,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에서 마틴 슐레스키는 이렇게 말해주네요.

"완벽하고자 하는 사람은 차갑습니다. 완벽한 모양을 갖춘 바이올린이 꼭 좋은 울림을 내지는 않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수하지 않고, 비난할 것 없는 사람이 울림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울림은 자기 삶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때 생깁니다."

이 나이 먹도록 아직도 제 삶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죽기 전까지 모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다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덮어 놓았던 책을 꺼내서 다시 읽을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제 삶의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짧은 삶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살다 가는 것이 바로 마틴 슐레스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겠지요. 뒤늦게 블로그를 하는 것도 특별한 시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가문비나무(Picea jezoensis)는 소나무과에 속하는 상록 침엽 교목으로, 한반도에서는 주로 지리산, 덕유산, 설악산, 금강산, 백두산 등 고산 지대에 자생합니다. 이 나무는 높이 40~50m까지 자라며, 나무껍질은 회갈색으로 비늘처럼 벗겨집니다. 잎은 길이 1~2cm의 편평한 선형이며, 끝이 뾰족하고 잎 뒷면에는 백색 기공조선이 발달해 있습니다. 6월경에는 자홍색 암꽃이삭과 황갈색 수꽃이삭이 달리며, 9~10월에는 원통형의 솔방울이 익습니다.

*가문비나무는 목재가 연하고 부드러워 제지 산업에서 펄프 원료로 널리 사용되며, 건축 자재나 악기 제작에도 활용됩니다. 또한, 잎과 수지는 향료나 약용으로도 쓰입니다.
 
아봉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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