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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메밀꽃 필 무렵 -이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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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입이 잘 되는 저는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 한동안 그 속의 장면에 빠져 헤어나오질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래 전 목민심서의 '소설 정약용'을 읽고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강직한 그의 내면에 빠져 지냈고, 오스트레일리아 작가 콜린 매컬로의 '가시나무 새'를 읽고도 오랫동안 책 속의 주인공과 장면들을 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지난 해 공부하며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다시 읽었을 때, 어릴 때 읽었던 감정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읽혀졌습니다. 이효석의 대표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은 한국 현대문학의 아름다운 서정성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특히 달빛 아래 핀 메밀꽃밭의 풍경 묘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공부용으로 읽었으나 한동안 흐드러지게 핀 하얀 메밀꽃밭에서 헤어나오질 못했지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여름 끝자락, 봉평 장터에서 대화 장터로 가는 길목, 깊어가는 밤과 메밀꽃밭의 자연 풍경이 주요 배경인데 이효석의 문체와 서정성은 정말 시적이어서 한 면을 몇 번씩 또 읽었는지 모릅니다.  단지 한 편의 소설이 아니라, 마음속에 오래 남는 한 장의 풍경화였습니다. 달빛 아래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밭, 그리고 그 사이를 걸어가는 장돌뱅이들의 발자국은 제 마음 깊은 곳을 쿵쿵 울리며 지나갔습니다.

 

등장인물

허 생원: 장돌뱅이(장터를 떠돌며 장사하는 사람) 성격은 괄괄하지만, 속정이 깊고 외로운 인물

조선달: 허 생원의 장사 동료이자 친구

동이: 젊은 청년 장사꾼. 어딘가 허 생원과 비슷한 느낌을 줌

줄거리

허 생원과 조선달은 봉평장에서 장사를 마치고, 대화장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섭니다. 이때 젊은 장사꾼 동이가 이들과 동행하게 되며, 달빛 아래 세 사람은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핀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그 길에서 허 생원은 자신의 젊은 시절 외롭고 아련했던 사랑 이야기를 꺼내놓습니다. 


그는 과거 어느 장에서 한 과부와 하룻밤 정을 나누었고, 그 기억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있다고 말하는데, 이야기를 들은 동이는 묘하게 허 생원의 옛이야기와 자신의 출생 배경이 겹친다는 걸 느낍니다. 동이의 어머니 역시 과거 장터에서 만난 어떤 사내와의 인연으로 자신을 낳았다고 했습니다.

 

결국 허 생원은 자신과 동이가 부자(父子)일지도 모른다는 직감을 하게 되며, 혼잣말처럼 "그놈 참말 내 아들일까?"라고 중얼거립니다. 메밀꽃이 피어 있는 달빛 길 위에서, 과거와 현재, 외로움과 연결, 혈연의 실마리가 조용히 어우러지며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어떤 결말도 없이 독자에게 답을 남기며.

메밀꽃밭

 

성격이 괄괄하고 무뚝뚝할 것 같았던 허 생원이 젊은 시절의 사랑을 고백하던 순간은 그가 한없이 외롭고 속정이 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았던 그날의 기억, 소년 허 생원의 모습이 달빛 속 메밀꽃 향기와 어우러져 오버랩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을 울린 건, 허 생원과 동이 사이에 설명되지 않는 유전자의 끈이었습니다. 피붙이일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러운 예감, 말보다 더 깊은 유대감은 연결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 소설은 ‘메밀꽃’이라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인간 내면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내용은,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고요한 이야기처럼 읽혀지지만, 독자의 마음속에서는 잔잔한 물결이 되어 오래도록 퍼져나갑니다.

 

어느 해 다녀온 봉평 들녘을 하얗게 메운 메밀꽃밭이 떠오르고 그 길 어딘가를 걷고 있을 허 생원과 동이의 뒷모습을 상상하게 됩니다. 책을 덮으며 '내 아들아!'  '아버지'라는 속엣말을 왜 내뱉지 않았는지, 작가에게 항의하고 싶어지기도 했습니다.

 

책의 원본 문장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가제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달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모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모밀밭께로 흘러간다.

 

숨막히게 아름다운 문구를 시처럼 읽고 또 읽은 구절입니다. 

이렇게 좋은 문학은 삶의 어느 틈을 조용히 비추는 빛이 되어 우리의 삶을 밝혀 줍니다. 

 

안으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밖으로는 이국(유럽)에 대한 동경으로 나타나는 이효석(1907~1942)의 작품세계는 향수의 문학이라고 합니다.  1940년에 상처(喪妻)를 하고 거기에 유아(乳兒)마저 잃은 뒤 극심한 실의에 빠져 만주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돌아왔고, 이때부터 건강을 해치고, 따라서 작품 활동도 활발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1942년 뇌막염으로 병석에 눕게 되고, 20여일 후 36세로 요절하였습니다.(인터넷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메밀꽃 필 무렵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의 작품입니다. 나라를 빼앗긴 설움과 뼈아픈 통고의 삶이 주옥같이 아름다운 소설을 만들어내지 않았는지 생각해봅니다. 작금의 우리에겐 쓸거리가 없는 게 아니고, 깊은 성찰과 철학 없이 AI에 의존하며 써내려는 편안함 때문이 아닌지도 반성해보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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