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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이야기

단발머리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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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제가 사는 남쪽엔 단발머리 나무가 있어요. 이름을 몰라 제가 붙인 이름인데, 함양 산골짜기 가로수로 처음 만났어요. 댕강 잘라진 나무가 얼마나 귀엽던지 볼 때마다 단발머리 나무야~~ 하고 불렀답니다.

 

녹음 짙어진 어느 해 가지만 앙상하던 나무에 연두색 무언가가 조롱조롱 붙어 있어 자세히 보고 깜짝 놀랐답니다. 꽃인가 했더니 꽃처럼은 보이지 않고 열매처럼 생긴 무언가 많이 매달려 있더라구요.

능수느릅나무

 

아버지가 군인이어서 아침이면 기상나팔 소리와 군가가 들려오는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오밀조밀 작은 초가와 스레이트 집이 몇 채 섞여 있고, 언덕 끝에는 작은 성당이 하루 세 번 종을 치며 삼종을 알리는 고즈넉한 시골 마을이었죠.

 

그중 저희 집은 다른 곳보다 좀 크고 우물이 있어 동네 사람들이 물을 길으러 오고,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목을 적시고 가는 집이었어요. 저 아랫동네에서부터 아이스케키 장사며, 간장 장사 아저씨 등이 '아이스케키', '간장' 사라며 소리를 지르며 오다가 저희 집에 머물러 큰 아카시아 나무 아래에서 쉬다 가곤 했어요.

 

아이스케키~~ 하는 소리가 들리면 부리나케 온 집안을 뒤지며 빈병이나 찌그러진 냄비를 찾아 헤매다가 병이라도 찾으면 그날은 달달한 아이스케키를 먹는 날이었죠. 하지만 쉽지가 않았기에 외할머니께 졸라 어쩌다 얻어 먹는 아이스케키 맛은 기가 막혔어요.

 

그런데 간장 장사 아저씨가 '간장, 간장!!!'하고 소리 지르면 우린 모두 쏜살같이 도망을 갔어요. 왜냐구요? ㅋ 아저씨는 작은 나무 발판을 하나 끼고 다녔는데 그 위에 저희를 앉혀놓고 이발을 해주었어요. 엄마는 그 아저씨가 오기만을 기다렸지만, 저희는 그 아저씨가 어디가 아파 병이라도 나서 오지말게 해달라고 늘 기도를 했어요.

 

참으로 밉게도 상고머리를 깎아 주어 늘 투정이었지만, 그곳에 사는 동안 어쩔 수 없는 저희의 운명이었어요. 

 

마치 능수느릅나무처럼 댕강댕강 잘린 단발, 모두가 똑같은 동네 여자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그럼에도 저 단발머리 나무가 정겨운 것은 제 어린 시절을 상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능수느릅나무의 꽃이랍니다.  이런 색의 꽃이 피다가 오른쪽처럼 남아 나중엔 연두색 오글오글한 몸피가 저 씨앗을 감아 위 사진처럼 된다는 거죠.

 

능수느릅나무는 한국 토종 나무랍니다. 여름엔 그늘이 무성하고, 겨울에도 골격이 아름다워서 정원수로 인기가 있으며 한국 전통 정원이나 오래된 사찰 주변에도 종종 심는다고 합니다.

 

만일 저 수북한 씨앗의 색이 보라였다면, 분홍이었다면, 빨강이었다면 어땠을까. 수북한 보라, 수북한 분홍, 수북한 빨강이었다면 저렇게 소박하고 겸손하고 품위 있어 보이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음전한 자태하며, 멋을 부렸지만 티나지 않는 아름다움을 단발머리 나무는 조용히 뿜어내고 있었어요. 촌스런 단발버리 나무에게 또 하나의 귀부인 나무라는 이름을 붙여주어야겠습니다.

저 멀리 간장, 간장, 간장!!! 아저씨의 외치는 소리도 들려오는 듯한 나른한 봄날 오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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