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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이야기

서울대공원 벚꽃 길과 봉덕 칼국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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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 눈보라(잠깐), 우박까지 휘몰아치는 4월의 봄날, 어제부터 오늘까지 비가 하염없이 내립니다. 빗길 운전하는 것도 좋아하고 비맞고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는데, 따뜻했던 봄날이 갑자기 추워지니 기를 펼 수가 없네요.

 

오래 전 약속이니 비 내리는 고속도로를 타고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향했습니다. 벚꽃 길 하면 서울대공원 미술관 가는 길이 황홀하지요. 일부러 봄이 되면 혼자라도 벚꽃 구경하러 미술관 가는 길을 따라 가곤 했어요.
 
오늘은 그쪽은 생략하고 어린이 동물원 근처에서만 걷기로 했어요. 함께한 후배가 몸이 좋지 않아 초췌한 얼굴로 나왔는데, 5년 전 유방암 수술을 받았고, 재건수술을 했는데 몸에서 받아들이질 않아 항생제를 7개월 동안 먹다가 결국은 재건을 포기하고 다시 재수술했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합니다. 부디 이제 아프지 않기를 소망해봅니다. 예쁜 얼굴이 핼쑥해졌는데도 더 빛나보입니다.

서울대공원 벚꽃길

 
아이들이 어릴 땐, 어린이날이면 서울대공원에 갔어요. 그 넓은 주차장이 꽉꽉 차고도 모자라 입구에도 차가 들어가질 못해서 차도에 길게 늘어서 있었기에 다시는 어린이날 가지 말자고 맹세하곤 했구요. 그래서 평일의 어느날 한가할 때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질리도록 놀이기구를 타게 했지요.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중학교에 들어가니 제가 데리고 다니지 않아도 아이들은 지들끼리 열심히 찾아다니더라구요.
 
그 오래 전의 서울대공원을 오랜만에 찾아오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비가 오는데도 리프트는 오가고, 동물원의 동물들 냄새, 마지막 벚꽃놀이하러 온 사람들이 여러 포즈로 사진을 찍으며 기록을 남기네요.

새집을 얹고 있는 벚나무

 
저 새집은 부실공사를 했어요. 아래가 뻥 뚫린 저 집은 다시 돌아올 새들이 공사를 새로 시작하겠지요.
야무진 새들이 부실공사를 했을 리는 만무하고, 아마 올 겨울 모질게 많이 내린 눈과 바람이 저렇게 만들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어느 봄날/나희덕

청소부 김씨
길을 쓸다가
간밤 떨어져내린 꽃잎 쓸다가
우두커니 서 있다
빗자루 세워두고, 빗자루처럼,
제 몸에 화르르 꽃물 드는 줄도 모르고
불타는 영산홍에 취해서 취해서
그가 쓸어낼 수 있는 건
바람보다도 적다

대공원의 왕벚꽃

 
대공원을 나와 과천 한국마사회쪽으로 향하다 돌다리 하나 건너면 바로 봉덕 칼국수집이 나옵니다. 으슥한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어 모르는 사람은 찾아가지도 못할 것같은 봉덕 칼국수집은 11시 조금 넘었는데도 점심식사를 하려는 사람들로 속속 채워집니다.

샤브칼국수

 
한끼를 먹어도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 하고, 일품요리를 차려 먹던 예전과 달리 그저 한끼 떼우기 위해 먹는 요즈음입니다. 일품요리보다 1품요리를 기억해내느라 애쓰기도 하지요. 밀가루를 끊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것도 잘 안 되는 외식인데 오늘의 칼국수는 추운 날씨 쪼그라져 있는 우리를 품위 있게 만들어줬어요.
 
매운(그다지 맵지는 않지만 빨간) 국물에 미나리와 버섯이 들어 있는데, 따로 나온 소고기를 넣어 익으면 먼저 야채를 먹어요. 양이 적은 것 같았는데 먹다보니 제법 되네요. 칼국수 면이 수타인지 매끄럽지 않고 우둘두둘해서 쫄깃한 식감이 흡입하게 만들어요. 저희 옆자리 남자들은 볶은밥까지 주문해서 남은 국물을 덜어내고 볶아 먹는 걸 보니 꽤 맛있어 보였지만 저희는 생략했습니다.

 

이렇게 봄날 잔치는 끝났습니다. 율동공원에 흐드러지게 피었을 벚꽃과 목련꽃을 보지 못하는 한을 이렇게 풀어줍니다. 어서 아들부부가 돌아오고 제 집으로 갈 날을 기다립니다. 문득 봄날 잔치라 쓰고 보니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시인의 시가 기억나는 봄날 밤입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최영미
 
...중략...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모으리라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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